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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년
    에세이 2020. 3. 10. 23:18

    4~5년 전 쯤에 언론사 시험을 준비한 적이 있다. 지금 돌아보면 도피나 다름없었다. 그때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 가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잘할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관심 있었던 것이 사회 문제였다. 글 쓰는 것에도 관심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 블로그도 잘 하지 않지만. 나는 사기업보다는 언론사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사기업에서 잘할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으니 제대로 준비를 할 리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을 하면서 준비했는데, 대부분의 날을 신문이나 대충 읽으면서 보냈다. 글도 잘 쓰지 않았다. 어쩌다가 글을 써도, 남들이 내 글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두려워서 혼자 검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스터디도 하지 않았다. 제대로 한다면 한겨레 언론학교 같은 곳에 가서 배우는 게 맞았겠지만 그마저도 하기 싫었다. 그때에는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도서관에서 일하느라 시간과 돈이 없어서 언론학교 같은 곳에는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핑계인 걸 알았다. 붙을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든 일정을 잘 조정해서 언론사가 제공하는 강좌에도 등록하고 스터디도 열심히 참여했어야 했다. 그러니 잘 될 리가 없었다. 언론고시는 크게 서류와 필기, 실무 평가와 면접으로 구성되는데 필기를 뚫는 때가 많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이 총체적으로 무너져 있던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도 천운이 따랐는지, 메이저 언론사 한 곳의 필기를 뚫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필기 합격자의 수가 최종 합격자 수의 5배수 정도였을 것이다. 실무 및 면접 과정이 며칠 동안 진행됐다. 결과는 어땠을까? 인생 걸고 준비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대충 매일매일 신문이나 보면서 인생을 낭비한 내가 제대로 경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를 제대로 해내기보다는 어떻게든 눈앞의 과제를 최저 요건만 갖춰서 해결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나중에는 아예 ‘즐겜’ 하게 됐다. 어이없게도 거기 기자 지망생들에게 웃긴 말이나 하고 나니 과정이 끝났다. 그때 나는 꽤 웃긴 사람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것을 잃은 기분으로 아무 말이나 하니까 기자 지망생들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인생에 목숨을 걸지 않고 웃음에 목숨을 건 자가 되었으니 안 웃길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설마 붙지도 않겠지만 만약 붙는다고 해도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고, 그 과정이 끝난 다음날 기자 준비를 그만두게 된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그 기수에서 합격한 기자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메이저 언론이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진보 성향의 언론사 중 나름 메이저인 곳에 경력직으로 입사해서 일하고 있었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때 합격한 기자들이 뭘 하고 있는지 검색해 봤다. (안다. 소름끼치는 거.. 미안합니다.) 대다수가 그 언론사에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외교 관련, 어떤 사람은 경제 관련.. 무슨 칼럼도 쓰시고.. 기레기라고 욕도 먹으시고.. 저마다 커리어를 잘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 진보적인 언론사에 경력직으로 들어 온 분도 그렇고. 하긴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4년의 시간은 짧은 게 아니다. 다들 한 사람의 어엿한 언론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뭘 했나? 나는 얼마 전에 신입 사원으로서 회사에 입사했다. 2년 동안 작은 회사에 다니며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2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그리고 이제야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같이 시험을 봤던 사람들이 4년의 커리어를 쌓는 동안 나는 사실상 멈춰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열심히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겠지만 나는 신입 사원의 입장에서 처음부터 일을 배워 나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4년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문서 편집과 관련된 일을 하며 나는 편집적으로 오타와 정렬에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띄어쓰기도 신경 쓴다고 썼다가 지웠다. 자꾸 틀리니까. 아직도 띄어쓰기를 잘 모르겠다...) 나는 이제 아래아 한글의 단축키를 조금은 안다. 모든 것을 더 귀찮아 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등의 쓸모가 없지만 대화를 이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잡지식들을 꽤 알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크게 무너진 시기도 있었다. 전기 면도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사회생활 속에서 모르는 사람은 경계하고 보게 되었다. 옷을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피트니스 센터를 낯설지 않게 느끼는 불성실한 운동인이 되었다. 팔꿈치터널증후군이 생겼다. 오래 집중하면 사물이 겹쳐 보이는 사람이 되었다. 살이 빠졌다가 쪘다가 다시 빠졌다. 한국 역사에 대해 대단히 넓고 얕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4년의 시간 동안 있었던 내 변화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이제 나는 내 과거를 미워하는 데 지쳤다. 합리적인 경제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지금 과거를 후회해 봤자 아무 것도 얻을 게 없다. 조금 더 낭만적으로 보고 싶다. 그동안 나는 어떤 부분에서는 진보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퇴보했다. 반으로 딱 잘라서 진보한 것만 안고 가고 퇴보한 것은 버리고 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많은 일들이 다 내게 필요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일들이다. 변한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 아닐까. 현대의 삶을 견디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인간의 육체로 그 긴 시간을 견뎌왔다. 충분히 수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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