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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 - 오모아시 2021. 12. 21. 23:37
오래 쓴 앙상한 수건을 접으며 생각한다 섬유 조각들과 떨어져나온 습기들을 생각하며 공기를 생각하며 떠다니는 물 분자들처럼 목적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처럼 우연히 마주치는 뉴턴적 양자적 것들 아닌 것들 믿고 싶은 것들 목적이 있는 것들 없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보이는 것들 보이스카웃처럼 미안합니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믿는다 자신을 믿고 격자 속 격자처럼 남을 신뢰라는 것을 하고 기대하고 소설처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나는 어쩐지 침을 삼키기가 어려워진다 오랜 습관이다 나는 아무 것도 되고 싶지 않았지 보이스카웃도 아람단도 왜일까를 생각하면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극적인 어쩌고가 젠가를 쌓아올리는 피라미드를 쌓아올리는 이집트 노예 아니 노동자 철의 노동자 석회석의 노동자처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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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과연 야마모토야 - 김오식시 2021. 7. 21. 21:27
야마모토의 삶의 궤적들을 불쌍한 인간들 가엾은 육신을 타고 태어난 너희같은 어리석은 피조물이 알고 있는가 조물주가 조물조물 빚어낸 야마모토라는 하나의 존재 거대한 인간을 넘어선 십새끼를 너희들은 알고 있는가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블리자드가 휘몰아치는 배틀크루저의 고향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외딴 한 항구에서 야마모토 야마모토슨의 아들 야마모토 야마모토슨은 눈을 크게 뜨고 이 안의 모든 질소를 전부 그의 두 개의 허파에 집어넣을듯이 그의 천연 헤파필터가 99퍼를 달성하기 직전 식도에 박힌 청어가시는 아무것도 아닌듯이 마치 외로운 과메기와 같은 것처럼 김치꽁치처럼 그렇게 골반을흔들며 외쳤다 빠가야로 오늘같은 어둡고 황량한 들판 속에서 풀을 뜯으며 노는 아기 염소를 먹는 하이에나를 먹는 콕코두들두처럼 고독해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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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 - 변주영시 2021. 1. 8. 18:12
나는 가끔 내 배를 통과하는 실 같은 뜨거운 알루미늄 같은 거짓말 같은 총알을 실밥같이 남은 상처를 생각한다 나는 관자놀이를 맞은 것처럼 무릎부터 앞으로 넘어지고, 침대처럼 내 볼은 평평하고, 눈을 뜬 채로, 초침이 멈추고,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 아닌 것도 사라지고, 폴리에스터가 젖고, 누군가도 젖고, 어떤 것은 그대로이며 어떤 것은 변하고, 무의미한 일들은 더욱 무의미한 일들이 되고, 이어폰은 여전히 진동하고, 한쪽은 귀지로 막혀 있고, 감정 없는 영국인 탐정처럼 나는 누군가의 흙을 맛보고, 나는 그림처럼 비로소 나는 불쌍해진다. 사람들이 모이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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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컬레이터 - 나신덕시 2020. 1. 4. 00:20
에스컬레이터 나신덕 나는 긴 에스컬레이터에서 뒤를 보면 현기증이 난다 사라진 과거가 발판처럼 나를 따라올 때 당장 그 지점으로 낙하해도 내 발판과 손잡이 묻은 지문들 기름 뾰족한 검은 쇠들 그 사이 공간들 먼지처럼 숨어 있는 각질들 섬유들 찰나의 감정들, 움직임들 교차하는 인물들 표정 없이 울고 있는 동상들 눈을 깜빡이던 순간 증발하던 감상들 흐려지던 초점들 그 모든 것이 순간이었음을 이미 한참 위로 전차의 궤도처럼 돌아가는 그들을 (나는 손잡이를 잡을 때 안심한다) 생각하면 발을 떼야 한다 발판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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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수민 - 선분들시 2019. 12. 14. 00:56
선분들 모수민 모퉁이를 돌아나는 들어간다 선분들로빌딩의 그림자를 밟으며다세대 주택 사이로도망치는 쥐며느리들 이 길을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내 앙상한 과거 위에 세균처럼 모여 있는기억들이 모션 픽쳐처럼 나를 추적한다견뎌야 돌아갈 수 있다 내 보잘 것 없는 세계로여전히 기어가는 쥐며느리들 나는 가끔 바퀴벌레를 돌로 내리쳤던 일을 생각한다이리저리 튀어오르는 파편 사이로 하얀 속살이 보였다 어쩌다 나에게 이렇게 협소한 세계만이 놓였을까이 선분들을 견디고 나면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어디론가 움직이는 쥐며느리들 나는 몸을 말 줄 모르는 쥐며느리를 말리다가 죽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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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훈 - 주공 2단지시 2019. 12. 10. 23:32
주공 2단지 주대훈 주공 2단지 버려진 배구장 족구장 흙바당에서 축구공을 차다가 비둘기의 머리를 맞힌 적이 있다 기울어진 대가리 대가리. 어딘가를 보는 과녁 같은 눈으로 나는 추워진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던 곳 고운 흙 사이 작은 자갈 같은 눈. 빨간 자위 한가운데 검은 눈동자 초점 없는 검은 자위 무엇을 보았을까. 스타 축구공 초등학교 옆 문방구에서 빨간 그물에 넣어 팔던 천천히 날아오는 축구공 옆의 움직이는 사람들 안개 같은 입자들 그림자 우리집에는 축구공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새는 그리운듯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다 날아갔다 우리는 계속 철망 한 칸으로 공을 찼다 주공 2단지가 재개발될 때 전세집이던 우리는 메뚜기처럼 튀어나갔다 풀밭엔 한쪽 비둘기 날개가 스포츠 브랜드처럼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