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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롤> - 관계의 저울
    영화 2022. 2. 28. 00:18

    * 이 글에는 영화 <캐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 관계는 균형 잡힌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균형 잡힌 관계여야 그 관계도, 관계에 얽혀 있는 독립적인 인간들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관계는 여러모로 한쪽으로 꽤 기울어진 모습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 저울을 맞춰가는 테레즈의 성장담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계급적 긴장감이다. 이는 영화의 초반부, 캐롤과 테레즈의 첫 만남에서 드러난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줄을 서서 백화점에 들어가 일하는데, 캐롤은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들어와서 장난감을 구매하려는 상류층 부인이다. 이러한 관계는 영화의 각 장면에서 드러난다. 캐롤의 집에 온 테레즈는 자연스럽게 잡일을 하고, 캐롤은 이를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테레즈의 집에 캐롤이 찾아오는 장면에서, 캐롤은 테레즈에게 카메라를 선물하며 발로 민다.

     

    둘은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캐롤은 이미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반면 테레즈는 남자친구가 있으며, 자신에 정체성에 대해 계속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소수자, 더구나 1950년대라는 시대상 때문에 테레즈와 캐롤의 관계는 오히려 더욱 폐쇄적이며, 테레즈에게 캐롤은 사랑 그 자체가 된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도록 도와준, 문을 열어 준 사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동등해지기 어려운 존재이다.

     

    그래서 관계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캐롤에게 쥐어진다. 관계의 저울이 기울어져 있으면 기울어진 측에서 존중을 통해 저울을 다시 맞춰야겠지만, 캐롤은 관계에서 테레즈를 그렇게 존중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캐롤이 테레즈를 자신의 삶에서 끊어 낸 선택은 소수자로서 자신의 다층적인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캐롤은 레즈비언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어머니이기도 하기 때문에, 어머니로서 자신의 양육권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관계의 시작, 발전, 결말은 모두 캐롤의 의사대로 좌우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뀐다. 캐롤은 자신답게 살기 위해 양육권을 포기하고 다시 테레즈를 찾는다. 테레즈는 캐롤의 카메라 덕분인지 사진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 된다. 관계를 복원하고 싶어서 테레즈에게 찾아간 캐롤의 표정은 조금 긴장한 듯하다. 항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관계의 키를 쥐고 있었던 캐롤이지만, 지금만큼은 관계의 키가 테레즈에게 있는 것이다. 마침내 저울이 맞춰진 걸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테레즈는 수많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수많은 기성세대들의 숲을 뚫고, 그 기성세대들과 자연스럽게, 조금은 따분한 듯이 웃으면서 대화하고 있는 캐롤에게 걸어간다.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의 일을 찾지 못했던, 미성숙하던 테레즈는 없다. 어쩌면 캐롤이 열어 준 문을 지나 테레즈는 마침내 캐롤과 동등하게 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를 보며 캐롤이 보이는 웃을 듯 말 듯한 표정. 캐롤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준비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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