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탑> - 변화의 방향
    영화 2022. 11. 23. 00:21

    (* 이 글에는 영화 <탑>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을 봤다. 이 영화는 병수(권해효)가 탑 모양의 건물을 올라가는 구조로 구성된다. 1층에서 병수는 자신의 딸과 함께 건물주(이혜영)과 대화하고, 2층에서는 식당에서 건물주와 식당 주인인 선희(송선미)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3층에서는 탑에 거주하면서 선희와 동거하며, 마지막 옥상에 거주하면서 지영(조윤희)을 맞는다. 이 과정에서 병수는 다양한 방면에서 변화하고, 이는 일관된 흐름을 보인다. 이에 대해 내 나름의 해석을 보이고자 한다.

     

     

    영화의 의미

     

    병수는 인정받는 영화 감독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명세는 건물주와 병수가 연결되어, 병수가 자신의 딸을 인테리어 업자인 건물주에게 소개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2층에서도 영화는 병수가 사람들과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2층 식당의 주인인 선희는 병수의 영화를 보고 병수에게 호감을 보이며 비싼 와인을 대접한다.

     

    그런데 둘은 병수의 영화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선희는 병수의 영화를 볼 때마다 자지러지게 웃으며, 부담이 안 되어서 좋다고 한다. 근데 건물주는 병수의 영화를 아주 정색하면서 본다고 한다. 물론 이는 둘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서일 수 있다. 하지만 애초에 선희와 건물주 모두 영화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아무도 그 영화의 어떤 부분이 어땠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 영화는 단지 병수에게 유명세를 부여하는 도구이고 건물주와 선희는 그 유명세에서 비롯된 피상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병수에게 관심을 가질 뿐 영화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영화를 통해 의미가 전해지지 않고, 피상적인 이미지만 전달되는 모습은 홍상수 영화에서 드러나는 대화들과 닮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대화들은 대화의 외피를 갖고 있지만 사실상 혼잣말에 가깝다. 대화가 등장인물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 변화를 촉발하는 영화에서의 대화와는 달리, 홍상수 영화에서 대화는 자기 안에서만 맴돌 뿐 의미가 전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2층에서 얘기가 끊어질 듯하면, 선희는 병수에게 영화 정말 잘 만드세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병수는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답한다. 사실 다른 영화 속에서 잘 설계된 매끈한 대화 상황보다, 홍상수 영화 속의 대화 양상은 현실 속 대화와 닮아 있다. 그런 면에서 홍상수의 대화는 오히려 더 현실적이어 보인다.

     

     

    병수의 변화

     

    그런데 이처럼 영화를 통해 유명세를 얻은 병수는 2층에서 투자 문제로 인해 영화에 대해 매우 좌절한 상태이다. 더욱이 3층에 올라와서는 건강상의 이유로 영화를 은퇴하기까지 하며, 외국에서 열리는 자신의 회고 영화제를 가지도 않는다. 그런데 옥상에 올라온 병수는 4층에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우고 있다. 무려 12편의 영화를 찍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을 정도이다.

     

    어이없게도 병수가 이러한 열정을 불태운 것은 신적인 체험이다. 병수는 신을 믿는다는 선희의 말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신이 인간들이 뭔가에 기대고 싶어 만들어 낸 존재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병수의 변화는 2층에서의 그의 말에 정확히 부합한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영화를 은퇴한 그에게는 뭔가 기댈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신적 체험은 그를 다시 영화적 열정으로 빠져들게 하도록 만든다.

     

    탑을 올라가면서 건강을 대하는 병수의 태도도 변화한다. 2층에서 그는 채식을 시도한다. 통념상 채식은 건강식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건강을 지키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병수는 옥상에 올라와서는 담배를 열심히 피우고 술을 마신다. 그리고 꿀에 절인 인삼과 같은 건강식품을 먹으면서 건강을 지키려고 한다. 담배와 술이라는 명백히 건강을 해치는 요소를 사용하면서도, 꿀에 절인 산삼같이 불확실한 효과를 가진 건강식품을 먹으며 건강을 지키려는 모습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이때 꿀에 절인 산삼을 가져다 주는 사람은 누구일까? 옥상에서 만난 지영이다. 지영은 인간관계에 대한 병수의 변화한 태도를 보여 주는 인물이다. 병수는 탑을 올라가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노력보다는 상대방의 의사에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예를 들어 선희가 만나는 사람을 통제하려 하던 병수는 지영이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인물이 된다.

     

     

    변화의 방향

     

    신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으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되찾고, 술담배를 하면서도 불확실한 건강 식품에 의지하는 변화가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주도권을 잃는 방향이라는 것이다. 자신 주변의 세계를 냉철하게 인식하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통해서 주변의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비이성적인 요소를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부에 병수가 지하를 가고 싶어하지만, 건물주에게 위로 올라간 다음에 가자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병수는 잠깐 지하에 들르기는 하지만, 영화사의 대표를 만나 금방 나와야 했고 지하로 돌아가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나 가능했다. 이는 병수에게 일어난 변화, 즉 삶의 주도권을 잃는 변화가 일방향적으로 움직인다는 암시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보다 더 큰 무언가에 기대지 않으면 세상을 견디기 어려운 나약한 존재라는,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이 엿보인다면 과한 해석일까.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시> - 뒷전이 된 이야기  (0) 2024.01.14
    <메이의 새빨간 비밀> - 위화감  (0) 2022.04.19
    <캐롤> - 관계의 저울  (0) 2022.02.28
    <돈 룩 업> - 디스토피아의 입구  (0) 2022.01.13
    <위플래쉬> - 사다리 올라가기  (0) 2021.04.15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