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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토피아> 비판 - 블랙 아웃
    영화 2019. 12. 4. 23:23

     

     

     

    * 이 글에는 <주토피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토피아>의 주인공 주디는 경찰을 꿈꾸는 토끼다. 주디는 피나는 노력 끝에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든 동물들이 어울려 행복하게 산다는 '주토피아'에서 경찰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주디에게 주어진 건 토끼에 대한 여전한 차별. 하지만 주디는 직장 내 괴롭힘을 극복하고 사기꾼 여우 닉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한다. 그런데 어떤 장면이 나오고, 이 영화는 지금까지 말한 것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주디가 해결한 사건은 육식동물이 야성을 되찾고 주위 동물을 공격하는 일이 연쇄적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모험 끝에 사건 후 어디론가 사라진 육식동물들이 시장에 의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찾은 주디는 기자회견을 맡는다. 그런데 주디는 여태까지의 총명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경솔하게도 육식동물들의 폭주가 생물학적 요소, 즉 DNA와 관련된 것 같다고 밝힌다. 직접적인 요인이 무엇인지, 외부 요인이 있었는지 전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확인 중이라고만 해도 될 일인데 굳이 본인의 추측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주디는 경험 없는 신참이고, 자만심이 생길 만한 상황이니까. 이때 DNA라는 말을 들은 닉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주디의 말이 누가 봐도 어이없는 언론 대응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닉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온 주디에게, 너는 나를 공격적인 포식자로 보고 있었던 거냐고 몰아세운다. 그리고 “내가 무서워? 내가 너를 잡아먹을까봐?”라고 주디를 위협한다. 주디는 반사적으로 한쪽 손을 여우 퇴치 스프레이 가까이에 댄다. 그걸 본 닉은 한 마디 한다. "그럴 줄 알았어. 너만은 나를 믿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를 잡아먹을까봐?

     

     

     

     

    닉은 왜?

     

    닉이 주디에게 실망하는 이유는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육식동물들이 야수로 변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주디를 위협해도 반사적인 반응조차 보이지 않을 거라는 기대이기 때문이다. 사건의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닉은 자신이 야수로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있기까지 하다. 닉은 어째서 그런 기대를 했을까? 제작진은 아무래도 모든 동물이 야성을 벗고 문명화되었다는 주토피아의 합의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다. 그 합의가 있으니, 친구가 친구를 신뢰하지 않는 건 잘못된 일이므로 이 장면이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주토피아의 합의는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진 강화 조약 같은 것이 아니다. 야수 상태에서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공존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육식동물에게 있다. 문명화는 육식동물의 초식동물에 대한 폭력성을 제어한 것이지 초식동물의 당근에 대한 폭력성을 제어한 것이 아니다. 주토피아의 합의는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석판에 새겨져 있으니 당위적으로 모두가 지켜야 할 계율이 아니다. 닉이 주디에게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을 경우 닉은 나를 못 믿는다는 거야? 한 마디 쏘아 붙이고 떠나면 되지만 닉이 정말로 가해자일 경우 주디는 닉의 먹이가 된다. 그런데 어째서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100퍼센트 신뢰해야 하고, 그걸 믿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까? 한 여성에게 굉장히 허물없이 지내던 남성 친구가 있는데, 갑자기 그 친구가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여성이 반사적으로 공포를 느끼는 상황에서 남성이 “거 봐. 나를 못 믿잖아. 너만은 나를 믿어 줄 줄 알았는데.”라는 상황에서 남성에게는 정당성이 있을까? 닉은 일방적이며 근거가 거의 없는 기대를 바탕으로 주디에게 자기를 무해한 사람으로 봐 줄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주디는 어떤 자기변호와 논쟁도 없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다.

     

     

     

     

     

    제작진은 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장면이 만들어진 걸까? <주토피아>는 소수자가 차별에 맞서는 이야기의 전형성을 비틀어서, 피해자 또한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한 것 같다. 어린 시절 여우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초식동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닉의 트라우마는 그러한 맥락에서 소환된다. 문제는 이러한 메시지를 관철하기 위해 영화는 너무 많은 것을 잃으며, 결정적으로 앞에서 말했듯이 그 메시지의 설득력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장면부터 주디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편의적으로 소모된다. 주디는 기자회견에서 평소답지 않게 매우 부주의한 발언을 하는데, 그것이 하필이면 닉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고, 어떻게 감히 '자신을 널 해칠 수 있는 대상으로 생각했느냐'는 닉의 분노에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한다. ‘감히 내가 어떻게 육식동물들이 야수로 변해 가는 상황에서 육식동물인 닉이 야수처럼 나를 위협하는 가운데 반사적으로 한쪽 손을 스프레이 쪽으로 둘 수 있지.’ 정도의 참회였을까? 설득력 없는 이야기를 관철하려다 보니 여태까지 저마다의 동기와 욕망을 갖고 활동하던 캐릭터들은 갑자기 제작진이 관철하려는 주제를 위해 작위적으로 행동하는 속이 텅 빈 손인형이 되어 버린다. 만약 그 장면에서 닉이 스스로의 문명화를 믿지 못하는 이야기로 갔다면? 하다못해 닉과 주디가 각자의 입장을 대변하여 대립하는 방향으로 갔다면? 그 시점에서 영화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그 많은 가능성을 무시하면서 일부러 최악의 길로 걸어 간다.

     

     

     

     

     

    끔찍할 정도의 나이브함

     

    이 영화는 마치 소주를 세 병 쯤 마시고 필름이 끊긴 사람을 보는 듯하다. 전반부 내내 열심히 한 이야기를 잊어버리고, 후반부부터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주디가 경찰서에서 받는 차별, 양 보좌관이 사자 시장에게 받는 대우 등을 보여 주면서 유토피아로 보이는 주토피아가 사실은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데 영화는 후반부에서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닉이 표출하는 분노의 기저에는 주토피아가 완벽한 평등 상태에 있다는 합의가 깔려 있다. 만약 주토피아가 완벽한 평등 상태에 있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신이 무해하다는 것에 대해 1퍼센트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디가 전반부 내내 경찰서에서 겪어야 했던 차별은 후반부에 들어서면 시트콤 에피소드 같은 일이 되어 버린다. 아무도 주디를 향했던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공고한 차별적인 체제가 가한 폭력은 우스꽝스럽고소소한 일들을 주디가 멋지게 극복해 낸 서사가 되어 버린다. 이 영화에서 체제 자체를 문제 삼는 급진적인 인물을 꼽자면 양 보좌관을 꼽을 수 있다. 빌런 답게 나쁜 수단을 활용하다가 좌절하긴 하지만, 그는 초식동물에게 차별적인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몰아내고 권력 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체제를 뒤집으려던 급진주의자 양 보좌관이 좌절하고, 개인의 노력을 통해 체제의 장애물을 극복한 주디가 성공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개인의 능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해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일들이 정말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 가능했던 일이었나?

     

    영화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이간질하려던 양 보좌관의 계략이 밝혀지고, 주토피아 구성원간의 신뢰가 회복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문제는 무엇일까? 서로 간의 신뢰가 깨어진 상황이다. 이는 적절한 결론일까?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서로를 더 믿어 주면, 이 세계는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우화는 우화 나름의 생명력이 있고, 자신이 담으려는 세계를 어떻게 단순화 시킬지에 대해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인종, 젠더 등의 소수자 이슈를 그린 영화에서 이런 결론을 내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창작물에서 소수자 이슈를 다룰 때에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소수자가 무조건 선으로 그려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비뚤어진 권력 관계를 무시하는 식의 결론을 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현실은 주토피아의 후반부보다는 단연 전반부에 더 가까울 것이다. 불완전하나마 있는 사회적 합의는 유리 천장 같은 차별, 다수자가 소수자를 해칠 수 있는 현실과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전반부와 같은 현실에서, 소수자가 다수자를 믿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결말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흑인 백인 서로 미워하지 말고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수준의 끔찍한 나이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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