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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 모두 거짓말을 한다
    영화 2019. 12. 10. 00:58

     

     

    * 이 글에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을 읽으시기 전에 밝힐 것이 있습니다. 저는 킹스맨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킹스맨: 골든 서클>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에는 킹스맨 시리즈의 전체 내용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내 부모님은 시장에서 문방구를 하셨다. 문방구 바로 옆집에는 옷집이 있었는데, 그곳을 운영하시던 분은 국회의사당의 정치인들을 싹 쓸어서 한강에 넣어 버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의 마지막 장면에는 전자칩을 이식한 엘리트들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지는 광경이 나온다. 만약 그 옷집 사장님이 그 장면을 봤다면 매우 만족하시지 않으셨을까?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민중의 그런 감정을 자극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러한 회의주의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때 어떤 장면이 나오는지를 보여 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기득권은 철저하게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 버락 오바마의 뒷모습을 닮은 미국 대통령은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기득권 이외의 사람들을 서로 죽이도록 만드는 계획에 찬성한다. 기존의 통로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회의주의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쓸데없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이나 빼먹는 제도 정치의 축소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이다. 정치에 대한 회의주의적 세계관을 실현하자면 제도권 정치를 우회하는 방식의 새 통로를 찾거나, 그 논리를 끝까지 말고 나갈 경우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회로 - 킹스맨

     

    킹스맨이란 조직은 제도권 정치를 우회하여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이들은 기존 제도권의 통로를 통해 제어되지 않고, 킹스맨의 윤리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의 시선에서는 제도권 정치보다 현대의 기사단의 윤리에 더 신뢰가 걸 수 있다. 하지만 킹스맨은 불완전하다. 아서(마이클 케인)가 발렌타인(새뮤얼 잭슨)과 협력하는 점에서 보이듯이 이들 또한 결국 기득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귀족적인 킹스맨 조직이 가지고 있는, 평민 배제적인 문화에서 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그나마 그 안에서 리버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은 갤러헤드(콜린 퍼스). 그는 그 유명한 교회 학살씬에서 혐오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그들 다수를 처형해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력성을 불러일으키는 유심칩은 어머니가 아이를 죽이려 할 정도로 맹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다. 그러나 겉으로는 신사의 매너를 이야기하던 갤러헤드가 대상을 직접 손으로 처형하는 과정은 꽤 상징적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이 영화가 나온 지 2년 조금 안 되어 당선된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심장하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수트핏과 끔한 머리 모양을 유지하던 갤러헤드가 잔뜩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자신의 분노를 분출하고, 수많은 못된 사람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죽이는 액션씬은 사실 꽤 통쾌한 장면이다. 기사단의 윤리에 따르면 갤러헤드는 그들을 살해하면 안 되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정치적 반대자를 폭력적으로 제거하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결국 겉으로는 고상해 보이던 갤러헤드 또한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장면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질문하지 않는 이야기

     

    이 영화 전반에 짙게 깔린 회의주의는 엘리트에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도 향한다. 무료 통신을 제공하는 유심칩을 제공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구상이다. 현실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갑자기 자선의 의미로 평생 무료 통신이 되는 유심칩을 나눠 주면 사람들이 좋다고 사용할까? 마크 주커버그가 사람을 속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통신비를 무료가 아닌 반값에 저렴하게 제공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대안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굳이 그렇게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기득권이 자기만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것처럼, 대중들은 공짜라고 하면 묻거나 따지지 않고 무조건 달려드는 우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는 그다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굳이 현실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다. 과연 투표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이 발렌타인의 공상적인 계획에 좋다고 동의할까? 자신을 지켜주는 안온한 시스템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기득권끼리 살기 위해? 여기서 이 질문은 불필요하다. 영화가 만들어 낸 도식적인 구도에서 기득권은 원래 국민들이 죽든지 살든지 간에 별 신경도 안 쓰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칩을 이식받은 엘리트의 숫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데, 그중 가임기 인구는 더 부족해 보인다. 인구 재생산이 과연 가능할까? 역시 영화는 별로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것이다.

     

     

    전복 - 폭죽쇼

     

    그러나 정치에 관한 회의주의를 제대로 된 서사로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기본적으로 정치혐오를 바탕으로 한 작품들은 얕은 고민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고, 도식적으로 흐를 위험도 너무 많다. ‘정치하는 녀석들은 다 썩었군!’에서 더 할 말이 마땅치 않기도 하다. 킹스맨이 선택한 길은 어땠을까? 이 영화는 고민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악당 중에 유일하게 자신의 욕망을 갖고 설득력 있게 움직이는 건 발렌타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즉 이 영화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만들어 낸 작위적인 기득권을 도식적인 구도로 배열하고, 어떻게 이들을 다양하고 재밌게 죽여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느냐에 집중한다.

     

    우회로였던 킹스맨도 그 수장이 배신해 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전복뿐이다. 그래서 전자칩을 박은 엘리트들의 머리는 폭죽처럼 터지고, 그동안 우스꽝스럽게도 화려한 음악이 흐른다. 정말로 옷집 사장님이 원하시던, 한강으로 정치인들을 싹 쓸어버리는 일이 실현된 것이다. 이는 가장 민중적인 해결이라고 볼 수 있다. 좋든 싫든 정치혐오의 정서는 대의 민주주의 정치를 하는 곳이라면 어느 정도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엄청나게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재인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주제에 대한 부연 설명을 공백으로 내버려 두고, 어떤 폭력으로 악당을 단죄할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그로서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무지막지하다. 절묘하게도 버락 오바마와 닮은 대통령의 머리가 터질 정도니까. 이러한 폭력적인 기득권 질서의 전복은 우리 안에 은밀하게 감춰졌던 무언가에 대해 이렇게 속삭인다. 모두 거짓말을 한다. 기득권들은 모두 악당이고, 사람들은 폭력적으로 악당들을 정치 공간에서 배제하고 싶다.

     

    이 영화가 나온 후 세계는 어떻게 되었나? 나오기 이전부터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었나? 영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시대를 반영한다. 우리는, 특히 미국에서 극우정치의 돌격을 보고 있다. 그들은 솔직함이라는 기다란 창을 쥐고 마상 돌격하여, '인권이라는 말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기존 온건 좌우파의 합의를 무찌르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 주는 '솔직함'과, 극우주의가 발흥할 수 있었던 토양이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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