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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색의 진실> - 때때로 그들은 우리를 잡아먹는다
    영화 2019. 12. 16. 00:52

     
    (<회색의 진실>은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이 글에는 <회색의 진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를 올리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하고 있으며, 그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 그의 커리어는 한 단계 위로 올라설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일가족과 함께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회색의 진실>은 이 사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음모론

     

    데이비드 크롤리는 어린 시절 군인을 동경했고, 이에 따라 입대했지만 그가 이라크에서 복무하면서 목격한 것은 부도덕한 전쟁이었다. 거기서 그는 진실이 시민들에게 가려져 있고 시민들이 이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음모론에 빠지는 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루미나티 같은 존재가 은밀히 시민을 감시하고, 나라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에 숨을 죽이고 모여 있으며 때가 되면 정변을 일으켜 정부를 장악하고, RFID 기술과 미리 지어 놓은 수용소 등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여 미국을 전체주의 국가로 만들 거라는 음모론을 믿는다. 이를 막지 못할 경우에 관한 데이비드의 영화가 바로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이기도 한 'Gray state', 직역하자면 회색 국가다.

     

    음모론적 세계관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은 방법이다. 숨겨진 거대한 악과 선악의 간명한 구도를 만들어 내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해하는 괜찮은 방법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숨겨진 사실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는 본인의 경험에 대한 설명을 원했고, FEMA 음모론은 그가 있을 자리를 제공해 줬으며 그는 FEMA에 대항하는 투사로서의 자신을 구성했다. 이것이 그가 찾은 새로운 삶의 의미였다.

     

     

    'Gray state' 컨셉 티저에 등장하는 FEMA 수용소

     

    통제광

     

    그의 성격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모든 변수를 통제해야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자였다고 회고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그와 기획사 사람들과의 파트너십 미팅에서 드러난다. 기획사 사람들이 기억하는 그는 겸손하고 차분한 청년이었지만, 그들은 데이비드의 사후 그가 혼자 녹음한 연설 리허설 파일을 듣고 당황한다. 그는 기획사 사람들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하고 그들이 할 만한 적대적인 대응을 시뮬레이션한 뒤 이에 대처하려고 한다. 또한 혼잣말로 자신과 파트너십을 맺으려는 기획사를 깎아내리고, 본인이 우세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고도 한다. 우호적일 수도 있는 대상을 적대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자신이 우세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과정을 통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영화를 올리는 일이 점점 현실로 다가올수록 그는 부담감을 느낀다. 더 이상 이 작품은 그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협력사도 있고,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고, 그의 동료들이 있다. 더구나 그의 영화는 그가 갖고 있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처럼 대단한 의미부여를 한 작품이므로 그의 성향 상 이 작품은 완벽해야 할 테지만 그렇게 완성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완벽주의자가 두려워서 일에 착수하지 못하는 건 흔한 일이다. 게다가 데이비드는 통제광이다. 자신만이 답을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방해한다는 생각은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하지만 결과물을 내놓는 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다.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사람들은 영화가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냐며 페이스북으로 데이비드를 압박한다.

     

    데이비드의 이러한 성향은 가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의 아내인 코멜은 자신만의 커리어가 있으며 독자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여성이지만, 데이비드에게 무척이나 의존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데이비드의 통제적 성향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음모론 영화를 만드느라 수입이 없다시피 한 데이비드로 인해 코멜은 생계를 혼자 지탱한다. 코멜은 인간관계 또한 무척 좁았다고 언급되는데, 데이비드의 영향이 있었던 건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이다. 폭력에 대해 집착하는 데이비드의 불안정한 행동으로 인해 그의 외동딸도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장면에서 아이가 뭔가를 그리자 데이비드는 "그걸 죽일거야?"라고 묻고 아이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내가 자라는 과정에서 혹시 누군가 나를 죽였어?"라고 아빠에게 해맑게 묻는다.

     

     

     

     

    예정된 파국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데이비드는 진실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테마에 대해 계속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진화한다. 코멜은 환청에 가까운 초자연적인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시기 데이비드는 코멜을 완전히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두 달 전 코멜의 언니가 17시간 동안 운전해 코멜을 찾아왔지만 데이비드는 코멜에게 "안돼. 당신은 당신언니 못 만나"라고 말하고 코멜은 이에 순응한다. 가족은 데이비드의 성이 되고 외부와 격리되다시피 한다. 데이비드와 코멜은 외부의 연락을 더 이상 받지 않으며,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졌는지는 데이비드의 메모와 비디오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정부가 진실을 감추고 있고, 시민들은 이를 깨달아야 한다’에서 시작한 그의 세계관은 ‘FEMA가 우리를 노예로 만들 것이고, 시민들은 이를 깨달아야 한다’로 변했고, 이제는 ‘신비로운 존재가 우리 주위에 있고, 우리는 이를 깨달아야 한다’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다. 영화를 따라온 사람이라면 그 사건이 누구의 소행인지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 있다. 데이비드는 코멜과 딸을 살해하고 자살한다. 그는 코멜의 피로 벽에 알라후 아크바르라고 쓰고 땅에는 코란을 펼쳐놓는다. 경찰은 살인 현장에서 그가 세심하게 고른 음악이 흘렀을 것이라고 한다. 그 직접적인 동기가 망상이었는지 용의주도한 설계였지는 이제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그의 동료 음모론자들은 그의 죽음을 음모론으로 구성한다.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삶은 서사로 완성된 것이다.

     

     

    "이건 그냥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입니다."

     

    영화에서 데이비드는 (아마도 다수가 FEMA 음모론자일) 자원봉사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건 그냥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훨씬 더 큰 무언가의 일부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거대한 선악 서사의 일부이기를 소망했고, 일단 만들어 낸 그의 음모론적 서사는 완벽주의적 이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폭주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거꾸로 주인을 잡아먹었다. 데이비드는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했지만 정작 그가 만들어 낸 음모론적 세계관은 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끔찍한 살인자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이 교차할 뿐인 이 무의미하고 무목적적인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무의미라는 공백을 어떻게든 채우기를 원한다. 누가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무의미함을 온 몸으로 받아내고 살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점만큼은 명심해야 할 듯싶다. 우리는 거대한 서사 안에 존재하기를 욕망하는 존재고 때로 이는 우리를 잡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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